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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판 결시친] 저는 가정폭력 생존자 입니다.

by 이야기NOW 2021.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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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방탈죄송합니다..


판은 중고등학교때 들어와보고 처음이네요.제가 너무 답답했나봐요..


어디라도 하소연을 하고싶었는지 제 이야길 아무한테도 할수 없어서 떨리는 손으로 감정을 누르며 외롭고 답답한 마음을 적어볼까 합니다.

 

 


저는 올해 29세가 된 가정폭력생존자 입니다.


아버지는 바람둥이었습니다.

 

여성편력이 있었고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근사한 말빨로 속아넘어간 제 친모는 두 아이를 낳고도 어쩔수없이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제 2살 위로 오빠가 있습니다.

 

오빠는 지적장애인입니다.

 

어렸을적 자폐아 판정을 받았어요.


엄마는 극진히 오빠를 보살폈고 오빠는 자폐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어머니가 벌어오는 돈으로 나가서 놀거나 외박을 해댔습니다.

 

(아마 바람을 피웠겠지요)


제 친모는 이 사실을 알게된 친정의 강한 압박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제가 6살, 오빠가 8살때였고 양육비를 주기 싫었던 아버지는 저희를 데려와 친할아버지댁에 버렸습니다.


밭농사를 짓는 농가집안이었기에 깡시골이었고 

 

어머니와 떨어지게되어 점점 자폐가 심해지는 오빠와 점점 성장하는 저를 감당하실수 없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저라도 데려가서 공부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얘길 하셨어요.

 

오빠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학교를 다닐수 있게되어 할아버지는 매일 포터를 몰아가며 등하교를 하셨고, 저는 곧 학교를 다녀야할 나이가 다가왔어요.

 


친부는 눈이 찢어진 어떤 여자분을 데려왔고 그 사람과 저를 인사시켰습니다.


이제부터 네 어머니 될 사람이라면서요.

저만 데려갔고 경기도에 대리석으로 된 6층의 빌라에 살게되었어요.

 


이때부터 저의 지옥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엄마의 정이 그리웠었고 계모에게 애교를 부리고 마음을 전부 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계모는 폭력으로 저를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폭력이 어떻게 시작된지 기억은 안나요


그때가 제가 7살이었으니까요.


아마 이때 뱃속에 제 이복동생이 있었던것 같네요.

 


곧 이복동생이 태어났고 폭력성은 더 심해졌습니다.

 

산후우울증이었을까요?그런건 모르겠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웠고 지옥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매번 저를 대리석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너무나 반짝거리고 차갑고.. 딱딱했습니다.

 

잊을수가 없네요.


꼬집는것은 기본이고 움직이지 못하게 배를 발로 밟은채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항상 제 두피는 들려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을 과하게 잡아당기면 큰 혹이난것처럼 머리가죽이 들려올라오는거 아시나요?


아빠한테 말했다간 입을 찢어버리겠다며 협박했고 아빠앞에서는 착한사람처럼 굴었습니다.


제가남자아이와 대화를 한것을 본 계모는 제 성기를 검사하고 손톱으로 상처를 내고 발가벗겨 기마자세로 몇시간을 벌세웠습니다.


저는 이때 남자아이랑 대화하면 큰일이라도 나는줄 알아서 고등학교때 까지도 제대로된 이성교제를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 7살 어린저는 남자아이랑 대화하는 날이면 ㄱㄹ같은 년이니 화냥년이라며 폭언을 당했고제 몸에 멍과 상처는 끊이질 않았습니다.


책을 읽도록 시켰고 읽지못하면 담배불로 지지고 뜨거운물로 샤워하게 했습니다.

 


학대만 가하는 계모가 제 진학에 신경이나 썼을까요.

 

저는 9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갈수있었습니다.

집안이 기울었는지 작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고 그 주택의 제 방은 보일러 실 옆 곰팡이 냄새나는, 빛 한점 안들어오는 창고였습니다.


아빠가 안들어오는 날에 매일 거기에서 폭력을 당했어요.


안방에 들어오는 날이면 저는 죽도록 맞는날이었고 물론 티비를 볼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만화영화나 아침에 방영하는 하나둘셋유치원도 저는 몰라요.

 


그치만 저는 사람을 좋아했어요.

 

집에서는 그림자처럼 아무런말도 못했고 밖에 나와서는 과하게 밝은아이었습니다.


저는 방학이 제일 무섭고 싫었습니다.

 

개학을 하면 말을 못하고 더듬었습니다


계모가 아닌 어떤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의지를 하고싶었나봐요.


그렇다고 초등학교때까진 깊은교우관계는 맺지 못하였습니다.

 

매일 꼬질꼬질 했고 매일 맞아서 얼굴은 물론 전신이 거무죽죽 했거든요.


집에 들어가는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지만 들어가야했어요 정말 죽으니까요.

 


혹시 투호 아시나요?

 

초등학교때 준비물로 많이 샀었는데.

 

그게 제 전용 회초리었어요.


그게 부러질때 까지 맞았고 남은 몇개를 주인할머니에게 숨겨달라고 애원했던 기억도 있네요.

9살인 저는 너무 배고팠던 나머지 아빠한테 햄버거좀 사와달라고 몰래 전화한걸 들켜서 계모에게 맞다가 아버지한테 걸렸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때려도 자기가 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늦은밤 저는 햄버거를 먹고 체했고 토를했습니다.


그날 저는 아버지에게까지 혼났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습니다.


제 기억에 이날은 가장많이 학대를 당한날입니다.

 

죽을뻔한 날이지요.

 

계모에게는 제대로된 명분이 생긴것같았습니다.


화장실이 아닌 방에 토를 했으니까요.


폭언을 하며 제 머리와 몸에 올라가 마구 밟다가 분이 안풀렸는지 형광등을 뽑아 저를 내리쳤고 산산조각 났습니다.

 


머리에서 이명이 들렸고 순간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귀가아닌 머리에서 들리는 이명은 너무나 무섭습니다.


귀가 안들리고 아무것도 안보인다고 말하자.


그때 새엄마는 정신을 차렸는지 물로 씻으라고 저를 화장실로 보냈고 방을 치우는 사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저는 도망쳤습니다.

 


도망칠수있었다는 사실조차 저는 몰랐습니다.

 

살기위해 뛰쳐나왔습니다.


도망을 가면서도 들킬까봐 금방이라도 뒤에서 저를 낚아채 집 안으로 끌고들어갈까봐 발을 옮길 수 없었고 겨우겨우 집근처에 주차되어있는 대형트럭밑에 기어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이윽고 멀리서 저를 찾는 끔찍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순간 나갈뻔 했어요. 너무나 따스하게 불렀으니까요.

 

그 끔찍한 목소리가 이내 사라졌고 저는 기어나와 어떤 빌라단지내에 버려진 소파위에 누워서 잠을 청했습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비릿한냄새와 어스름한 파란빛과 쌀쌀했던 날씨가 기억이 나요 한순간도 잊기가 힘들정도로 생생하네요.

 


어떤 아저씨의 고함소리에 눈이 떠졌고 손전등을 저에게 비추며 여러사람을 불렀습니다.


저는 어른들에게 둘러쌓여져서 어떤 경비실 같은데로 갔습니다.


그리고 차가워진 몸을 급한대로 신문지를 덮어주더니 누가 그랬냐고 하더라구요.


저는 계모에게 배운대로 모르는척을 했어요.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요.

너가 거울을 봐야할것같다며 벽에걸린 거울에 저를 데리고 가 보여줬어요.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을 덮고 있었고 떡진줄 알았던 머리카락은 피로 엉겨붙어있었습니다.


풍겨오던 비릿한 냄새는 전부 제 피였고 눈주변과 턱엔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피가 말라 얼굴을 더듬거릴때마다 슥슥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눈물이 터졌고 경찰이 왔습니다.

 

경찰아저씨는 누가 그랬냐며 물었고 엄마라고 밝힌뒤 이거 말하면 저 죽는다고 울고빌며 병원에 갔습니다


제 머리에는 여러개의 큼지막한 유리파편이 박혀있었고 그것을 빼내기 위해 수술을 해야했는데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하는수없이 계모에게 연락을 했고 수술을 했습니다.


머리를 꼬매는 느낌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머리카락을 하나씩 하나씩 뽑는 느낌이에요.

 


경찰은 저와 계모를 앉혀놓고 계모에게 학대한것 맞냐고 물어봤습니다.


아이가 토를 하는바람에 그랬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대답한뒤..


저를 같이.. 집으로 귀가조치 시켰습니다.



집에 귀가한뒤 저는 창고방이 아닌 거실에서 새 이불을 깔고 잘 수 있었고


등교할때 저를 세워놓고 멍든곳을 가리키며 이거 어쩌다 다쳤다고 할거냐고 물었습니다.


전 야구공에 맞았다고 하겠다 했습니다.


그때당시에는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도 없었고 아동보호법이 지금보다더 약했습니다.



그때 수술했던 곳에는 머리가 안나요.

 

저는 그럴싸하게 둘러대는걸 잘하게 됐습니다.

 

머리카락이 안나는 곳도 그럴싸하게 잘 둘러대며 살아왔습니다..


몸에 남아있는 계모의 흔적들도요 .

 


아버지에게 학대사실을 밝히지 않아도 됐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학대사실을 몰랐던게 아니라 방치하고 있던걸 이날 알았으니까요.


힘도없었어요 역시나 돈도 안벌어왔고 집도 안들어왔으니까요


항상 화풀이의 대상은 저가 됐고 계모는 언제부턴가 아빠 앞에서도 착한사람행세를 하지 않게되었습니다.


오히려 제 악담을 했죠.


벌써부터 남자를 밝힌다, 여우년이다, 저년이 이복동생을 해친다는 등..

 

제가 듣는 앞에서 저는 그런아이가 되어갔습니다.

 

 


저는 7살때부터 13년간 폭언과 폭행을 당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어린이집을 가야했던 이복동생과 함께 어린이집과 공부방이 붙어있는곳에 저를 보냈고 그곳에서 선생님을 잘 만나 함께 교회를 다니며 일반 아이들과같은 정서를 배웠습니다.


학원선생님이었던 그분덕에 공짜로 학원도 다녔고 공부도 곧잘 하게되었습니다.

 


그렇게 여자중학교에 들어가게되었고 착한친구들을 많이 만나 사회성을 길렀습니다.


뭐든 잘 흡수하는 편이었던것 같아요.


그럼에도 계모의 폭력은 계속 되었고 더이상 이복동생은 울며 말리지 않을정도의 인지력이 생겼습니다.


제가 맞고있는데 무표정으로 방 문을 닫았던게 아직도 생각 나네요.

 


계모는 제가 공부를 할수있는 환경을 주지 않았어요.


계모는 변변한 학력이 없는걸로 알고있어요.


제가 똑똑해지는게 싫고 대가리 커봤자 쓸데없다며 공부하지못하게 8시만 되면 불을끄게 했어요.


강제취침이었죠.

 

뭐 그덕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키가 170이에요. (항상 체중은 기아수준이었지만요)

 


저는 중학교때까지 핸드폰이 없었습니다.

 

작은 카세트에 학대내용을 테이프로 녹음해 왔던게 유일한 증거였지만, 평소 계모는 제 소중한것들을 버리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고 그것들을 찾아내어 다 갖다 버렸습니다.

 


저는 다행히 나쁜길로 빠지지 않았어요.

 

비록 매년하는 청소년우울증검사에서 위험수준의 결과가 항상나왔지만.

저는 살고싶었어요.

 

삶에대한 애착이 있던게 아니라 죽도록 맞아서인지 죽음이 곧 공포였거든요.


일부러 밝은척하려고 한게 아니었지만 집 안과 집 밖에서의 제 모습은 너무나 달랐어요.

 

학교친구들은 해맑고 장난끼많은 제가 가정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까요.


계모는 끊임없이 아버지와 제 사이를 이간질 하고 아버지를 무시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에게 폭언을 쏟아냈고 술에 쩔어살며 되었고 계속되는 세뇌로 결국 아버지는 저를 거부하셨습니다.

 

 


궁금하실것 같아요

 

왜 신고를 안했는지 친척들은 뭘했는지.


저는 어렸을때부터 세뇌당했고 학교에서도 아동학대에 대해 교육받지 않아서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미 경찰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걸 알았기때문이죠.


계모는 절대적인 존재였고 제 최고 공포의 대상이어서 제 운명이었고 탈출할 용기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야 작은엄마에게 학대사실을 말했으나 작은아버지의 일때문에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제 주변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네요.


아버지는 3남 1녀중 장남이었지만 아버지 빼고 다들 잘살고 잘나갔어요.

 

아버지는 형제들에게 여러번 손도 벌리고 신세도 많이 졌어요.


아버지는 술에 의존했고 알콜중독치료센터에 강제로 입원시키기도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아버지가 속썩일때마다 계모의 화풀이의 대상은 또 제가 표적이 되었죠.

 


고등학교때는 제 특기를 살려 여러 대회와 공모전을 나가 스펙을 쌓았고 교내의 현수막에는 제 이름이 여러차례 걸려질 정도로 성실히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어떤 대학교가 개최한 대회에서 수상을 했어서 무리없이 대학진학도 가능했었지만,  대학교라는 이야길 하면 폭언을 쏟아냈습니다.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제가 발랑까져서 학교도 빠지고 남자만나서 술담배하는 불량한 학생으로 알고있었다고 하네요.

 

세뇌한거죠.

 

골이 깊어져 제대로된 대화도 안했구요.


그러니 아버지의 도움은 꿈도 못꿨고

 

 


대학을 진학하게되면 더 돈도없고 지옥같은 생활이 지속될것같아 최선의 선택으로 취업을 했습니다.


운좋게도 안정적인 회사에 한번에 합격을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 들어가자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을하게되었으니 네가 교복을 사줘라, 여태 키워줬으니 월 100은 갖다바치라는둥 협박을했고 그 지옥같은 집에서 2개월 버틴뒤 20살 2월에 저는 탈출을 했습니다.



그해 몇개월 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술때문인거겠죠..

 

여러번 복수가 차 결국엔 사망했어요.

 


아버지 장례식때 상주는 여자인 저였습니다.


장례식장엔 제 친구들과 회사사람들로만 가득 채워졌습니다.


저는 원망도 할줄 몰랐고 화낼줄도 몰랐어요.


격한감정이란 모두 계모의 것이었으니까요.

 


평생 몰랐던 감정이 그제서야 몰려왔어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계모가 역겨웠어요.

가족들이 모여 입관식을 할때 계모는 아버지에게 입을맞추며 사랑해 여보 라고 말하는걸 보고 저는 실신해버렸습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땐 입관이 끝나고 난 뒤었습니다.


허탈함에 빈소로 돌아오니 친구들이 달려와 안아주었고 장례식이 끝날때까지도 제 회사사람들과 친구들은 빈소를 지켜주었습니다.


주변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왜 처음 용기가 났을까요.

 

왜 하필 그제서야..

 


그리고 발인날 관이 불속으로 들어갈때


처음으로 계모에게 네가 죽였다며 나도 저렇게 죽이려 하지않았냐며 소리를 질러대며 울부짖었습니다.


처음이에요 용기가 난게..

 

제가 너무나 멍청했고 바보같았고 당하기만 했던 머저리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한번도 계모의 얼굴을 쳐다본적이 없었는데 그때서야 어떻게 생겼는지 알수있었습니다.


이복동생이랑 아주 판박이더라구요..

 

 


그 이후로 고작 복수라고 계모와 이복동생과도 연 끊는것이었네요.

 

그 지옥같았던 13년을 버텼는데 저는 여전히 힘에 부쳐요.

 

 


23살이 됐을 무렵 친모의 오빠 즉 외삼촌이 찾아왔습니다..

 

2년을 저만 찾아다녔대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총 동원해도 할수 없었다고.

제 친모가 죽었대요. 제가 20살에요

갑작스럽게 병에걸려서 가셨다네요.


연애도 안하고 제 남매만 그리워하다가 쓸쓸히 갔답니다.

 

 


저는 계모에게 너무많이 학대당해서 그런지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게 학대당하는 와중에서 찾아볼 용기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가정사를 알고있는 공부방선생님은 친모가 너를 찾을법도 한데 안찾는 이유가 가족을 꾸리고 잘 살기 때문일것 같다는 말을듣고 좌절했던 적이 있어요.



왜 그 한마디만 듣고.. 그말에 왜 찾아보지 않았을까..


저는 처음으로 후회라는걸 했어요.


그이후 과거로갈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싶냐고 묻는 질문엔 항상 19살때로 가고싶다 말해요.

 

엄마 찾아서 살릴려구요. 같이 살려구요.

 

못받았던 사랑도 다 받고 못 줬던 사랑도 다 주고요.


후회스럽게 1년1년 살아가고있네요.

 



저는 의욕이 강하지 않습니다.


도망치는법도 주체적으로 행동하는방법도 몰랐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약한사람을 짓밟는 폭력적인장면을 못봅니다.

 

저에겐 현실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벌컥여는것도 무서워요.


가끔 마음이 불안할때 꿈에 계모가 나와 괴롭힙니다.


그냥 등장만 해요 그것만으로도 공포라서요.

 



친엄마의 사망소식을 듣고 난 이후 회사를 다니며 모아둔 돈으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지금은 아직 결혼은 안했지만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친구에게 제 유년시절 절대 말 못해요.


어릴적 남자친구에겐 학대당한 사실과 암흑같았던 어린시절을 털어놨던적이 있었는데그게 제 약점이 되더라구요.

 


엄마의 정 궁금해요..


열심히 드라마나 영화 보면서 학습한게 전부에요.


그래서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수 있을 지 겁이납니다.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가족이란 무엇인지 겪어보질 않아서 겁나고 막막하고 이따금 슬퍼집니다.

 



요즘 정인이 사건을 계속해서 접하고 거기에 너무나 빠졌나보네요.


이제사 악몽도 덜 꾸고 정서도 안정됐는데 다시 악몽을 꿉니다.


나는 잘 버티며 살아왔는데 계모 용서절대 못해요.



제가 괴로워서, 계모는 참 남자를 잘못만났다 오죽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저는 학대당했던 한 순간순간 다 기억나요.


친모얼굴은 기억도 안날 정도로요.


제일 아픈 병에걸려 처절하고 쓸쓸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요근래 혼란스러워요.

 

작은엄마가 자기 딸 해달라며 다가오거든요.

 

아들 둘만 있어서 자기 외롭다며 이쁜데좀 데리고 다녀달라고 조르고, 호텔놀러가자며 예약했다 해놓고 22살된 아들 데려오고..


8월에 이사하는데 좀 도와달라고하고..


외국에서 잠깐 한국 들어왔을때 원룸 사는 아들집엔 갈수 없으니 저희집에 2주 격리하겠다고하고..


자기 갱년기라고 아들 필요없다며 저한테 감정을 다 쏟아내는데 혼란스럽네요..


이건 또 글을올리겠습니다..(보실지는 모르겠네요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외면했으면서 다가오는 작은엄마의 이기심도 싫고,

가정폭력이란 저질러서는 안되는 범죄고 제가 당해왔던 모든것은 살인미수들이었고,,

 
저는 살아남았다는게참 답답하네요..

 

운이좋았다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어떠한 처벌도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그때나 지금이나 없다는게 너무 막막하고 슬프네요.

 


제 긴 글 우울하기만 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말할곳 찾다가 얼굴도 모르는 분들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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