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막내셨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보면 농사일을 도우라며 책을 불태워버리는 불학무식한 형들을 둔 사람이었지요. 중학교에 내는 월사금을 집에서 내 주지 않아 시골 학교 1층 창문 바깥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던 슬픈 현실의 주인공 이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농고에 진학합니다. 가난하게 살기 싫었던 아버지는 공부만이 신분상승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농고에서 한두명 진학하는 대학생의 꿈을 꿉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탁월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매우 성실하고 집요한 성격이어서 앉으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었고 운동에 만능이었고 사교성이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함과 뚝심으로 공부를 매우 잘했지요. 당연히 농고에선 일등이었고 지역에서도 수위를 다투었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아버지도 경제적인 이유로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연고가 없는 서울로 올라오는 것이 무리였던터라 숙식을 해결할수 있는 친척이 살았던 부산으로 가야했고 부산대 상경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게 됩니다. 아버지 말로는 성적은 서울대에 갈 수 있었다고.. 엄마도 아빠도 공부 다 잘했다는데.. 뭔가 미심쩍긴 합니다.
부산대를 졸업하는데 군대포함 10년정도가 걸립니다. 중간중간에 돈이없어 입주 과외 선생을 하기위해 휴학하고 돈을 벌어 복학하고 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버지는 졸업후 지금의 금융감독원과 재정경제부의 전신이라 할수있는 경제기획원에 발령이 납니다. 가장 엘리트들이 가는 코스였다고 하니 공무원 시험성적이 좋았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계속 의심 중
그렇게 살아가다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립니다. 집의 재산을 늘리거나 투자하는것에 대한 관심은 없으십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테니스를 치면 공무원대회 우승, 골프는 배운지 일년여만에 싱글이 되는 스타일입니다. 주변에 적이 없고 다 아버지를 좋아합니다. 집에서만 인기가 별로입니다.^^
다행인건 술을 안좋아 하시는것과 꼬박꼬박 월급을 잘 가져다 주고 용돈을 조금만 타 쓰시는데 그 돈으로 테니스 골프 고스톱 등 내기를 해서 돈을 거의 항상 따는 스타일이어서 궁핍하게 지내진 않으셨지요.
그리고 아마 서울대를 못가신게 억울하셨을까요? 석사를 서울대에서 하십니다. 박사는 제2의 고향인 부산에서 학위를 갖추시지요. 공무원이 얻게되는 박사학위는.. 제가 인정을 해주진 않고 있습니다. 정식보다 뭔가 야매같은 수월함이 있어서였겠지요.^^
이런 이유에서 일까요. 좋은 대인 관계와 추진력 그리고 갖춰진 학벌과 학위로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성공가도를 달립니다. 어머니와 시작은 9급으로 똑같이 하셨는데 23년만에 고위공직자인 3급 국장급이 됩니다. 1993년도 였습죠. 그렇게 흘러흘러 정년퇴직을 하고 차관급인 지방전문대 학장까지 역임하시며 2005년 즈음에 최종 은퇴를 하시게 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90년대에 들어서서 돈이 조금 수중에 생기시자 아버지는 친구의 말을 듣고 제주에 땅을 사게 됩니다. 그때에는 제주도민이 아니면 제주 땅을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살수있는 시대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제주사는 친구 명의로 2천만원 정도를 들여 땅을 사지요. 이 땅은 제주에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3~4년만에 약 3배정도 상승하는데요.. 친구분이 아버지께 돈을 빌렸다고 주장하시기 시작합니다. 네... 원금만 돌려받고 땅은 제주 친구분 소유가 됩니다.. 친구와 분쟁이 싫다고 그냥 그렇게 몇천을 손해보고 인연을 끊습니다. 저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장을 시켰을텐데... 고위공직자로 권력도 가지고 있었는데.. 제 아버진 참 호인 이십니다
그렇게 되찾은 돈으로 다른 친구분과 함께 가평 구 도로변에 주말에 놀러가서 쉴 아파트를 하나씩 매입합니다. 신 도로가 개통되면서 구 도로는 아무도 가지않는 도로가 됩니다.ㅜㅜ
저희도 놀러안갑니다. 5년 가지고 있다가 원금 아래로 탈출합니다. 다른 부동산들 5년이면 2배씩 오르던 시절입니다.
2003년이 되었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더니 최저임금을 매년 10프로씩 올리고 돈의 가치를 막 떨어뜨립니다. 부동산이 폭등하기 시작합니다. 하루밤 자고나면 개포우성 1차는 천만원씩 호가가 뜁니다. 노무현 초기 10억도 안되던 집이 3년만에 24.9억 실거래가 찍힙니다. 2006년 10월 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소유주인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과하게 올랐다. 정점이다. 지금 팔고 2년만 타워팰리스 전세로 살자.
거기 갔다가 2년후에 지금판 25억이면 개포우성 1차 31평짜리 두개를 살수 있게 될거다. 두개사서 그거 결혼할때 나하나 주면 되지 않느냐 곧 경제 위기가 올 사이클이다........ 입이 닳토록 이야기 합니다.
(타워팰리스 살아보고 싶기도 했었습니다. 친구들이 많이 사는데 커뮤니티 이런거 부러웠죠 ㅜㅜ)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웃기지마라 강남은 불패다. 그리고 이사가기 귀찮다...........
2008년 리먼사태로 진짜 폭락이 찾아옵니다.
06년 말 25억하던 45평은 09년초 17억이되고
06년 말 16.5억하던 31평은 09년초 10.7억이 되었지요
25억 즈음에 45평을 팔고 타워팰리스로 전세를 가면 2년후 개포우성1차 31평 두개를 다시 살수 있다는 제 예측이 현실이 됩니다. 09년초 31평이 11억이 안되게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현재 45평은 평균 33억이고 31평은 25억이네요
14년뒤 약 17억을 손해보게 만든 06년도 아버지의 투자 의사결정이었습니다.
어머니마저도 부동산을 모으고 늘리는걸 좋아하시다 보니 이매각은 좀 꺼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이전글에서 언급했던 감성투자.. 산좋고 물좋은 곳에 살리라는 아버지의 은퇴 로망에 2008년 8억에 구입한 성복동 50평 아파트는 입주시 5억이 실거래가가 됩니다. 3억을 순식간에 날리게 되죠. 제가 손해본다고 내 명의로 준다는 데도 싫다고 뜯어 말렸던 건이었습니다... 이건 뭐 입지의 기본도 안된 장소입니다. 지하철역도 없고 여기다 왜 집을 사야하는지..깝깝한 곳이였지요
차라리 꼭 사야했다면 여기를 샀어야지요(당시 성복역이 없긴했지만 들어오게 되면 이쪽으로 온다는 이야긴 있었습니다)
이 두건의 투자결정으로 사실상 20억이 날아간겁니다. 그리고 성복동 투자를 위해 팔아야했던 광화문 오피스도 이후 훨씬 더 올라갔으니 그 차액과 몇년간의 월세수익도 날리게 되었지요.
그냥 아버지가 아무것도 안하셨다면 성복동만 사지 않았더라도 2009년에 개포우성 1차 31평을 11억에 제 명의로 샀을겁니다. 성복동 가격에 3억만 얹으면 살수 있었죠.. 아버시는 제가 더 빨리 부자가 되는 길을 이렇게 막으셨지요. 흙흙
1. 06년에 개포우성을 팔고 전세로 갔다가 다시 두채를 사는 재진입 전략을 따르지 않은 것
2. 08년에 뜬금없이 감성투자로 지하철도 없는 성복동 대형 아파트를 덜컥 산 것
어쨌든 이 두 건의 아버지 주도의 투자 실패 사건 이후
저희 집안의 부동산 투자에 관한 결정권은 제가 갖게됩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오피스텔 및 수지 아파트 매도 결정도제가 결정하고 실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즘도 집안에서 부동산 관련 이야기를 할때는 저는 이 두 흑역사를 꺼내들고 기선을 제압하고 부모님은 입을 다무시거나 그만하라며 볼멘소리를 하시지요.
ㅋㅋㅋ
이글의 포인트는
1. 친구 믿고 투자하면 아무것도 못 얻고 친구만 잃게된다.
(제주 투자건)
2. 가평에 주말 별장? 수지에 공기좋은 대형 아파트?
나이브한 마음으로 한 투자는 반드시 손해로 참교육을 받는다. 도로 유동인구도 없고 (가평) 지하철역도 없는 (성복동) 지역에 집을 왜사냐?
3. 끝없이 오르는 건 없다. 과열은 꼭 진정되는 순간이온다.
정점에서 팔지 못했다면 최소한 과열이 진정된 후
저점에서 사기라도 해라.
4. 직장에서의 성공과 투자에서의 성공은 다른 영역이다.
다음글은 제 투자이야기를 좀 연재해 볼까합니다. 주식이야기가 될거지만.. 그래도 전개에 흥미는 있게 적어보려합니다. 당신께 알려주고 싶은 나의 주식노트 로 찾아뵙겠습니다.
제가 모레까지 휴가라 글 쓸 시간이 넉넉해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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